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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 movie

너무 한낮의 연애, 김금희

by S o d a m 2018. 10.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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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한낮의 연애'의 양희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이 소설은 드라마로도 나왔다고 한다. 양희를 연기한 배우는 최강희라고 한다. 엄청 잘어울린다. 필용 역에는 이선균이 어울릴 것 같았는데 아쉽게도 다른 배우다.



 





[너무 한낮의 연애]

필용은 창가 자리에 앉아, 회사와 떨어져 혼자 종로에 앉아 있는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이미 넘겨버린 점심시간에 대해. 십년 넘게 늘 회사에 있었던 평일 한시 이십오분에 대해.


그때까지 필용이 만났던 여자애들 중 그렇게 부끄러워하지도 뭔가를 숨기려 들지도 않는 사람은 없었다.

필용도 건장한 이십대니까 언제나 여자에 대해 생각했고 여자가 중요했지만 그래도 양희는 아니었다.


"아니.... 네가 날 사랑한댔잖아. 킬킬킬킬.... 그 고백을 들은 거잖아, 지금.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앞으로 우리 어떻게 되는 거냐고."

"모르죠, 그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고."

"알 필요가 없다고?"

"지금 사랑하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했는데, 내일은 또 어떨지 모르니까요."


필용은 황당했다. 얘가 지금 누굴 놀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며?"

"네, 사랑하죠."

"그런데 내일은 어떨지 몰라?"

"네."

"사랑하는건 맞잖아. 그렇잖아."

"네, 그래요."

"내일은?"

"모르겠어요."


시선은 일방이어야 하지 교환되면 안 되었다. 교환되면 무언가가 남으니까 남은 자리에는 뭔가가 생기니까, 자라니까, 있는 것은 있는 것대로 무게감을 지니고 실제가 되니까.


"선배, 사과 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이런 나무 같은 거나 봐요."


필용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래, 누구를 탓하겠는가. 감상에 빠져 시간을 보낸 건 바로 자신이었다. 이제는 팔다 팔다 팔 게 없으니까 추억까지 팔아서 어쩌려고. 부끄러웠다.






[조중균의 세계]

아무것도 쓰지 않고 이름만 적는 건 부끄러운 일이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얻어지는 형태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세실리아]

얼음통에 얼음을 잔뜩 쌓아놓기를 좋아했고 그렇게 얼음이 빙산처럼 쌓이면 술 먹기 게임을 해서 정신이 흐릿해지고 정신에 금이 가고 정신이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마침내 정신이 붕괴될때까지 마시고 싶어했다.


"그러면 어떤 게 예술인 거야?"

"어떤 거라니?"

"여기 있는 구덩이야, 동영상이야?"

"어차피 상관없어, 어떤 작품은 자신만을 위해서 만들기도 하니까."


"몇년 웃을 걸 다 웃은 것 같다. 넌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게 재미있어졌니?"

 어떻게 살긴. 밥도 먹고 술도 먹고 빚도 지고 남자들이랑 잠도 자면서 살았지. 그렇게 살면 이렇게 평안하고 재미있어진다.


그 마음 내가 전문이지. 밤은 오고 잠은 가고 곁에는 침묵뿐이고 머릿속은 시끄럽고 그러면서도 뭐 또렷하게 어떤 생각은 또 할 수 없어서 그냥 나 자신이 깡통처럼 텅 빈 채 살랑바람에도 요란하게 굴러다니는 듯한 느낌.


그러고는 긴 침묵이었다. 나는 무슨 닭요릿집이 이렇게 멀까, 생각했다. 여기서 우리집까지 가는 길은 또 얼마나 먼가. 우리 집으로 가서 오늘의 일을 잊기까지는 또 얼마나 멀 것인가.


취객들은 항상 집을 향해 걷는다. 집이 생각나지 않을 땐 집으로 가는 방향이라고 생각되는 길로 걷는다. 가다가 여기는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니네, 하는 생각이 들면 집이라 믿으며 걷는다. 우리는 늘 취하고 집으로 가지 못하지만 그건 우리가 집으로 가는 길을 모르거나 집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야. 술을 마시면 마음이 곧잘 파쇄된 얼음처럼 산산조각나곤 하니깐 아무 곳이나 집인가 싶어 그러는 거지.


세실리아는 그렇게 파고 또 파고 들어가서 어디까지 파들어가고 싶었을까. 그곳은 어떤 고통의 바닥, 말로도 이미지로도 전할 수 없고 오직 행위로만 드러낼 수 있는 상처들이 엉겨있는 바닥이겠지. 여기가 바닥인가 싶다가도 또다시 바닥이 열리는, 그렇게 만화경처럼 계속 열리는 바닥이겠지.






[반월]

엄마도 주기의 중요성을 알았다면 지금보다는 덜 불행했을 텐데. 수입은 일정한 주기로 들어와야 한다. 부모는 일정 시간 집에 머물러야 한다. 삶에는 파도가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일정한 간경으로 밀려왔따 밀려나가야 한다.


그러니까 어디가 아픈 게 아니라 그냥 아파서 아픈 건데 엄마는 항상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


나는 네가 나를 자꾸 단짝이라고 부르는 게 싫었어, 미웠어, 화가 났어. 너는 우리 학교 왕따, 바보, 미친년이잖아, 네 애인이라는 사람도 네가 애인이라 부르는게 끔찍하게 싫었을 거야. 그런데 내가 이렇게 울고 있다니, 네가 죽었을까봐 이렇게 무섭다니..... 답장은 쓸 수 없었다. 답장을 쓰면 난 죽지 않은 것이 되고 그러면 누구도 날 위해 울어주지 않을 테니까.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아주 망가졌지요. 요즘도 바다를 보며 왜, 하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안 그렇겠습니까.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생겼나 생각합니다. 나는 대학도 다녔어요. 집도 샀습니다. 사람들이 만만하게 보고 무시할 만큼 살지는 않았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생겼습니까. 왜, 무엇 때문에?"


이모, 이모는 왜 이모부와 살지 않았어요. 이모가 울면서 말했다. 사랑의 맹세는 나약했지.

이모, 이모는 왜 섬에서 나오지 않아요. 언젠간 바다를 건너겠지.






[고기]

아무도 못생긴 호두까기 인형이나 생쥐가 되려 하지 않으니까 그냥 다들 클라라를 하면 된다고 했다. "싫다는데 뭐하러 배역을 나눠. 그냥 모두 예쁜 클라라 하면 되지."


그건 사모님이 우릴 사람 취급 안 해서 그러는 거라고. 농장의 소돼지 지나간다고 옷 고쳐 입는 사람 봤냐고. 우리 앞에선 수치심이 없는 거라고. 일꾼들이야 그럴 수 있지만 내 앞에서도? 빡 돌더라고, 이십대였으니까. 기분 나빠서 안 봤지





[개를 기다리는 일]

품위가 있는 개라고 생각했다. 자존심이 무엇인지 아는 개라고 생각했다. 마치 자기가 개가 아닌 듯 하잖아.


오직 개라는 이름만이, 특징적인 형상과 품성을 암시하지 않는 그 불친절하고 표정 없는 단어만이 개에게는 어울렸다. 그런 개를 잃어버리다니. 그녀는 차 쪽으로 걸으면서 눈물을 닦았다.


그녀는 말을, 지독하게 낯설고 난해한 말을 익히고 싶었다. 익숙하고 편하고 그녀의 모든 생각을 담아주는 말들은 경계하고 싶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었다. 새로운 말,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 새로운 애착, 새로운 경계, 새로운 전망.






[우리가 어느 별에서]

수녀님은 고아원을 엄격히 통제했지만 마흔 명의 아이들에게는 마흔 개의 개구멍들이 있어서 요리조리 빠져나갈 순간들이 매일 생겨났다.






[보통의 시절]

마귀에서 샐러리맨까지는 간격이 큰 듯해도 살다보면 거기서 거기라는 걸 알게 된다. 그렇게 못 되면 그것이 더 나쁜 일이다.


나는 배우는 사람이고 배우는 사람은 순진무구한 사람이다. 순진무구한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아기 같은 사람이다.


여기는 언니네 집도 아니고 우리만의 추억이 담긴 장소도 아니고 맛집 같지도 않다. 그냥 여기는 그냥 여기인 것 같다. 사 년 만에 가족들이 아무 기대 없이 만나는 그냥 그런 곳같이 생겼다.


가진게 많은 사람은 여유가 있고 여유가 있으면 몽상이 생긴다. 가진 게 많으니까 지킬 게 많고 지킬 게 많은 사람은 불안하니까 몽상은 불안을 먹고 자란다.


아마 웃음 때문일 것이다. 같이 웃거나 같이 울고 나면 긴 공백을 뚫고 친밀감이 되살아나니까.


그렇게 몽상하다 멈추고 몽상하고 몽상하다보면 그런 일들이 다 맨숭맨숭해지면서 그냥 그런 보통의 일이 된다. 샐러리맨도 보통이고 마귀도 보통이다. 인간 말종도 원수도 가엾은 단독자도 다 보통의 것, 그냥 심상한 것, 아무렇지 않은 것, 잊으면 그만인 것, 거기서 거기인 것들이다.


진한 커피와 추로스를 먹으면서 생각했다. 단맛이 있구나 하고, 어찌되었든 오늘도 단맛이 있는 날이긴 하네, 하고.






[고양이는 어떻게 단련되는가]

이럴 때 다 같이 있어야지, 그런다고 혼자 잘되는 게 아니야.

알아요. 잘될 리가 없어요. 원래 제 인생이 그렇게 생겨먹었거든요. 그러니까 같이 뭘 하면 뭐 어쩌겠어요. 회사에서 하라는대로 할래요.


오르는 것도 오르는 것이지만 내려가지도 못하게 되면, 그래서 여기 올라와 있는 걸 아무도 몰라 구해주지 않으면 큰일이 아닌가,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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