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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book & movie

내가 정말 좋아하는 농담, 김하나

by S o d a m 2016.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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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볼 때 "편견"과 "고지식함"이 있는 분들이라면 이 책을 한번쯤 읽어보시길!

중간 중간 정치색을 드러내는 글귀가 보여서 신경쓰일수도 있지만...


'아이디어'에 관한 이론은 어떻게 보면 쉽고 진부할 수 있는데

주변의 다양한 사례들을 보여주기 때문에 와닿았다.

또, 그 사례들이 마냥 생소하지 않아서 더 친근했다.


게다가 카피라이터가 쓴 글이어서 마음을 울리는 구절도 굉장히 많았다.




사람들은 지식을 많이 쌓은 사람이 자연스레 지혜로운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지식을 많이 쌓기만 한 사람은 꼰대가 될 확률이 더 높다.

지식은 자칫 지혜로 이어지는 통로를 가로막는 벽이 되곤 한다. 그것이 지식의 저주다.




모든 이를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은 거룩할 것이나 모든 이에게서 사랑받고자 하는 마음은

욕심이나 아둔함에서 비롯된다.




배제해야 집중할 수 있고, 집중해야 비로소 어떤 색깔이 생기기 시작한다.

만둣국도 하고 아구찜도 하는 집보다는 만둣국만 하는 집이나 아구찜만 하는 집이 더 맛있는 법이다.




제품이든, 캐릭터든, 이야기 규모든, 형상의 크기든 사이즈를 크거나 작게 달리해보는 것은

전에 없던 무언가를 창출해낸다.




사람에게 짖거나 으르렁대지 않고 꼬리를 흔들며 좋아하는 개를 보고 착하다고 한다.

이것은 사람 중심적인 언어다.




요즘 사람들은 가격이 싸면 '착한 가격'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소비자의 시각에서만 그렇다.

생산자가 착한 가격을 맞추기 위해 제 살 깎아 먹기 경쟁을 하든, 후려치기로 하청 업체를 우려먹든,

노동자의 비용을 제대로 안 쳐주든 말이다.




내가 습관적으로 쓰는 말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칼퇴근이 아니라 그냥 퇴근이다.

야근이 아니라 초과근무다. 몸값이라는 말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무서운 말이다.




사람들은 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 해서 믿고, 그러지 않았다 해서 안 믿는 것이 아니다.

믿기를 원하기 때문에 믿고, 믿으므로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저세상'이라는 이야기 체계는 이 세상의 나를 위로해준다.

생선을 뒤집으면 배가 뒤집힌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배를 탄 남편을 둔 여인은 차마 생선을 뒤집지 못한다.

위로받고 싶고 기대고 싶은 마음이 있는 한, 설명되지 않는 믿음의 자아는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재미있게도 21세기에 SNS라는 최신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으로 이 구식 광고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은

'화법이 신선하다'는 것이었다.

시대착오적인 것, 즉 시대와 어긋나는 것은 종종 아주 매력적이다. 특정 시대의 인물을 다른 시대로 옮겨놓는

시간 여행물의 인기가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어찌 보면 발코니도 부착의 아이디어다. 건물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햇빛과 바람을 즐길 수 있도록 건물 외벽에 부착해놓은 조그만 공간이니까




수십 년 동안 세로로 서 있던 문장을 가로로 눕히자 어떤 문제가 벌어졌을까?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독성만 더 좋아졌다.




슬로모션은 인생의 왜곡일까? 누구나 인생에서 슬로모션으로 기억하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변환하는 기술, 이것을 아이디어의 변전술이라 해도 될 것이다.




사람들은 질문이 던져지면 자동적으로 대답을 찾기 시작하고 비어있는 부분이 있으면 채우고 싶어 한다.

이것은 두뇌의 자동시스템이다. 친구가 말을 꺼내려다 말면 답답해지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내가 당신에게 '언제, 어떻게, 어디서?'라고 물어보면 당신은 내게 대답하죠."

"글쎄요, 글쎄요, 글쎄요."

아마도 이 남자는 "글쎄요"라고만 대답하는 이 여자에게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불명확함은 밀당이 가진 힘의 본질이기도 하니까.




결말에 꼭 정확한 마침표만 찍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 영화나 드라마는 마지막에 감동을 강요한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감동은 만드는 게 아니라 관객 안에 차오르는 것이다. 무언가가 차오르려면 어딘가는 비어있어야 하지 않을까?




주도에는 올레길이 있다. 올레는 집 대문에서 마을 길까지 이어지는 아주 좁은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오랜 세월 사람들이 다니면서 생긴 길과 그 길의 흔적을 이은 것이 지금 우리가 아는 올레길이다.

올레길 홈페이지에는 이런 설명이 있다.

"끊어진 길을 잇고, 잊혀진 길을 찾고, 사라진 길을 불러내어 제주 올레가 되었습니다.

차를 타고 다니는 여행이 띄엄띄엄 찍는 점의 여행이라면, 제주 올레는 그 점들을 이어가는 긴 선의 여행입니다."




드라마뿐 아니라 뉴스까지 막장으로 치달리니 우리도 차츰 별일 없는 이야기에서 안식을 찾는 것일까?

웹툰에서는 자신의 별일 없는 하루하루 이야기를 올리는 '일상툰'이 확고한 장르로 자리잡았다.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순서는 절대 불변의 진리가 아닐 수도 있다. 일상의 작은 것에서 순서를 한번 바꾸어보자.

라면을 끓일 때 면을 먼저 넣는게 아니라 스프를 먼저 넣으면 끓는점이 높아져서 더 맛있다고 하지 않던가.

요즘은 우리나라에서도 재킷이나 코트 위에 조끼를 덧입은 스타일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래, 꼭 조끼를 먼저 입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런 것이 재미있다.




요컨대 어떤 기법이 널리 인정받고 정착되면 똑같은 기법에 다른 재료를 사용한 새로운 무언가가 태어나곤 한다.

주변에서 이런 것을 발견해보는 것은 아이디어의 유연성에 큰 도움이 된다.




상식이 꼭 나에게도 상식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술은 밤에만 마시고 잠은 밤에만 자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낮술과 낮잠은 또 얼마나 달콤한가.




고 이오덕 선생은 평생 우리 말글 지키기에 헌신한 분이다.

우리 말글에 남아 있는 일제의 찌꺼기를 없애는 데도 몸바쳤던 그분의 성함이 하필이면 '오덕'인 것은

짓궂은 농담 같다. '우리말 오덕 이오덕 선생' 같은 불경스러운 농담이 자동적으로 떠오른다.

이렇게 써놓고도 죄송한 마음이다.




말은 달아나는 것이고 법은 뒤따르는 것이다. 말을 잘 들여다보면 대중의 창의성을 관찰할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이디어'라고 하면 무언가를 새로 더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당연히 있어야 한다고 여기던 것들을 없앰으로써 기존과는 다르게 신선하고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 있다.

우리 주위에도 그런 것은 무수히 많다.

뼈 없는 순살 치킨, 무테 안경, 디카페인 커피, 씨 없는 수박, 미러리스 카메라, 끈 없는 브래지어, 무선 인터넷 등등.




자신감을 갖는 건 좋다. 하지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선언은 와 닿지 않는 뜬구름이 되기 십상이다.

좋은 슬로건은 자신을 잘 들여다본 후에 자신만의 개성과 장점을 다른 이들이 공감할 수 있게 표현할 때 나온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기도 하지만 그 숫자가 많은 걸 정리 해주기도 한다.




처음 운전을 시작하면 앞차 꽁무니만 따라가는 것도 버겁다.

그러다가 점점 백미러도 보이고, 나중엔 음악도 듣고 경치도 보고 차선도 바꿀 수 있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인생에서도 중년쯤 되면 반복적인 경험이 쌓이면서 노련함이랄까, 그런 여유를 갖게 되는 게 아닐까.

정신적으로든 경제적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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